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틴 학살 (문단 편집) === 냉전기 연구 === 카틴 학살이 드러났을 때부터 [[소련]]의 사법기관들은 [[나치 독일]]에 카틴 숲 학살의 책임을 전가했다. 독소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[[레닌그라드]]의 소련 군사 법원은 7명의 독일 국방군 병사들을 재판했다. 그들 중 한 명인 아르노 뒤레(Arno Dürre)는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다수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, 그는 카틴에서 폴란드 포로 1만 5천~2만 명을 매장하는데 참여했다고 "자백"했다. 이 자백으로 그는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아 사형만은 면했다. 하지만 그의 자백은 너무나도 엉터리여서, 심지어 [[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]]에 참여한 소련 검사들마저 그의 증언을 이용하지 않았다. 후일 뒤레는 자신이 조사관에게 고문을 당해서 억지로 자백했다며 이전의 증언을 취소했다. [[바르샤바]]로 환도한 [[폴란드 임시정부]]는 폴란드계 소련인들로[* 대표적인 사례로 소련군의 [[콘스탄틴 로코솝스키]] 원수는 [[폴란드]]계였기 때문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새로 생긴 폴란드 인민군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.] 구성한 [[위성국]]이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며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갖은 불이익을 받았다.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[[폴란드 인민 공화국]]의 당정군에서도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자가 득세했고 1970년대부터 폴란드 인민정부는 카틴 사건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재조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. 1980년대에 이르러 [[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]] 장군과 폴란드 인민정부는 진상 재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하였다. 이는 야루젤스키 장군이 1939년 당시 [[소련]]에 합병된 [[폴란드]] 동부 출신으로 [[굴라크]]에서 시력이 손상될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부모를 잃는 등의 고역을 치른 경험이 있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.[* 야루젤스키는 [[폴란드]]에서 논란이 큰 인물이다. 폴란드에서 1981년 반공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, 군부를 이끌던 야루젤스키는 소비에트 연방의 후원을 바탕으로 폴란드 인민군의 장군단을 앞세워 [[폴란드 통일노동당|폴란드 공산당]]의 당권을 빼앗아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군사정권을 출범했다. 이것 때문에 [[전두환]] 같은 악명을 뒤집어썼으나 야루젤스키는 [[프라하의 봄]]처럼 이런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군의 침공 징후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약처방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. 그는 [[폴란드]] 공산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정부의 수장이었으며 [[레흐 바웬사]]의 혁명이 성공하자 순순히 정권을 민주정부에 이양하여 물러나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막았다.] 서방 역시 더 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었고 더욱이 [[냉전]]이 시작되면서 [[소련]]의 악행을 선전하는 것은 체제 경쟁에 큰 도움이 되는 행위였으므로 바로 정밀 조사에 착수했다. 1952년 [[미국]] 의회는 카틴 숲의 학살은 소련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냈으며 1970년에 [[영국]]은 카틴 숲 학살 피해자를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하여 [[소련]]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. 1958~1961년 KGB 의장을 지낸 알렉산드르 셸레핀(Александр Шелепин)은 1959년 3월 3일 흐루쇼프에게 카틴 학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폴란드인 피살자 2만 1,857명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을 파기하자는 내용의 메모를 보냈다. 이 제안 자체는 실현되었으나, 아이러니하게도 '''3월 3일 흐루쇼프에게 보낸 그 메모가 보존되어''' 훗날 카틴 학살의 증거물 중 하나로 공개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